고대 인류 문명의 역사는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4대 문명의 발상지 또 많은 적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간 역사를 관찰하고 납득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분야로 여겨진다. 고대 인도 또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돋움을 이루고 있고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기원전 4000년 전후로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본으로 예상한다. 이 고대문명들이 건립한 찬란한 문화유산, 예컨대 세계 7대 기적의 건축물은 현재까지도 많은 대중들의 감탄과 경이심을 유발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또는 케메트는 수에즈운하 일대와 나일강 하류 쪽에서 번성한 국가 및 문명의 총칭이다. 기원전 15세기에 최전성기를 맞았던 이 문명은 제벨 바르카부터 나일강 삼각주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또한 이 시기에 에티오피아와도 무역하기까지 했다. 알렌사드로스 대왕의 점령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된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무려 3천년 동안이나 존재하였다. 원조 수로 제국으로서 관개 산업에 의존하였던 이집트 문명이다. 지리적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집트 영토의 대부분이 위치하고 있으나 서남아시아에 시나이반도가 있다. 이집트는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가지 지방이 마주 보고 있으며 리비아와는 서쪽으로, 수단과는 남쪽으로 그리고 지중해와 홍해에 해안선을 두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흔히 하이집트와 상이집트로 나뉜다. 남쪽에서부터 지중해를 향해 나일강은 북쪽으로 흐른다. 이집트 대부분의 인구는 나일강을 둘러싸고 밀집되어 있다. 나일강은 석기 시대와 나카다 문화 시대로부터 가까스로 이어져 온 이집트 문화의 동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칭했다. 에티오피아의 고원에서부터 나일 계곡의 물줄기는 갈라져 내려온다. 나일 계곡 외곽의 사막 지대는 대부분 거의 비가 내리지 않고 간신히 생기는 오아시스 주변을 빼고는 식물도 전혀 자라지 않는다. 나일 계곡 외곽의 사막지대는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수단 중북부의 앗바라까지 넓게 펼쳐져 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기독교와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에 생각해온 신들의 체계를 의미하는 게 이집트 신화이다. 일반적으로는 헬리오폴리스에서 신앙시 되고 있던 엔네아드를 바탕으로 전해지는 것이 많으며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은 대략 3000년에 걸친 긴 기간 동안 여러 번의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집트 각지에는 신전이 세워져 있고 여러 신들을 숭배하고 있다. 지방에 따라 신들의 서열이 각각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방에서 각각의 지역에서 신앙하는 신들의 신전이 건설되었다. 이집트 신화에선 파라오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호루스의 후계자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 의해 많은 성전이 지어졌다. 그 중 아부 심벨 신전을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엔네아드는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나오는 아홉 신의 집단이다. 개념적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12신과 비슷하다. 헬리오폴리스에서 엔네아드가 숭배되었으며 창조신 아툼, 아툼의 수족들인 슈와 테프누트, 슈와 테프누트의 수족들인 게브와 누트 게브와 누트의 수족들인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혼돈으로 가득한 심연에서 솟아오른 언덕 벤벤, 그곳에서 아툼은 창조신으로서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 공기의 남자 신과 습기의 여자 신인 슈와 테프누트는 아툼이 스스로 낳았다고 한다. 게브와 누트는 땅의 신과 하늘의 여신으로써 슈와 테프누트가 낳았다.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라는 4명의 신들은 게브와 누트가 낳았다. 일반적으로 정사각뿔의 고대 유적을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가 피라미드의 어원인데 이집트인들은 메르라 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수단의 나파타와 메로에에도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전자는 기원전 7~8세기의 나파타 왕국의 것으로 18개, 후자는 50개로 기원전 3세기 이후의 것이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중국, 중앙아메리카, 메소포타미아 등 수많은 문명권에서 피라미드 모양의 유적을 건설했다. 특히 고대 이집트의 건축물인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그중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다. 어느 한 시기에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무덤이 아니라는 설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국왕,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여러 미라가 발굴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장에 필요한 항아리, 황금 제품, 석관 등이 미라가 안치되었던 방에서 출토되었고 비문이나 부조 등에서 제사에 쓰였던 글이 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책인 역사 2권에 피라미드에 대한 최고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 책에는 10만 명이 3개월 동안 교대로 20년에 걸쳐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건설되었다고 기술되어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노예처럼 착취당하면서 지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있다. 1989년 발굴 조사로 피라미드 근처에 위치한 피라미드 마을이 발견되었다. 그 후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그 마을에는 노동자들이 묵었던 숙소, 저장고, 물품 관리소, 공방, 관리들이 살았던 저택 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곳 묘지의 벽화를 살펴보면 노동자들이 고기, 맥주, 채소, 빵을 먹었다는 진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상형문자와 유물들이 마을 사람들이 착취당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실제 동원된 노동자들의 숫자는 2만 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건축 기술의 개량과 발전,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처럼 거대한 피라미드가 건설될 수 있었다. 분명 단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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