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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몽골의 고려 침입

by 리틀풋 2022. 9. 13.

고려와 몽골의 전쟁 여몽 전쟁은 고려와 몽골 제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는 고려와 몽골 전쟁이 끝난 후인 삼별초의 항쟁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쟁 결과, 고려는 몽골에 패배하였습니다. 그래서 몽골의 간섭이 시작되었으나 끈질긴 저항과 협상으로 형식상 나라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몽골의 침입이 있기 전 고려에서는 최 씨가 무단정치를 하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몽골의 테무친이 등장하였습니다. 테무친은 몽골족을 통합하였고 1206년에는 본인을 칭기즈 칸이라 정하고 몽골을 강대한 나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칭기즈 칸은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양 서양 가릴 것 없이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뒤 남하하여 금나라를 침략하니 금은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는 대요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여진족과 친화하여 재기의 기회를 도모하였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다 결국 고려의 국경까지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과 동맹을 맺으며 거란족을 소탕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려에 들어오고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해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습니다. 몽골은 이를 계기로 하여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게 되고 해마다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고 고려는 몽골을 차츰 적대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몽골은 이 사건을 고려의 짓이라고 여기었으나 고려는 저고여가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점차 양국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고 마침내 국교 단절 사태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몽골은 고려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살해된 사건에 대해 꾸짖는 국서와 고려에 항복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고려와 몽골 간에 전쟁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몽골은 장수 살리타로 고려를 정복하도록 하였습니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지나 고려의 의주를 함락하였습니다. 이때 투항한 고려의 장수 홍복원과 그의 군사들과 몽골은 귀주성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귀주성을 방어하던 고려의 장수 박서와 김경손 그리고 고려군은 몽골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몽골은 귀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포차와 누차 등 많은 대형 병기를 동원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귀주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몽골군은 귀주성을 이내 포기하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전진하여 수도를 포위하였습니다. 고려 조정은 몽골군이 수도를 포위하자 별다른 대책이 없음을 깨닫고 몽골에게 화해를 요청하고 몽골 사신들과 살리타에게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쳤습니다. 고려 조정에서 화해를 제시하자 귀주성의 박서도 항복하고 전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 뒤 몽골군은 화해의 감시와 이후 고려에서의 간섭을 위해 개경과 평안도 일대에 다루가치라는 감독관 72명을 배치하고 철수하였습니다. 고려는 비록 몽골과 화해를 하였으나 이것은 고려의 본뜻이 아니었습니다. 또 앞으로 몽골의 태도 여하를 알 수 없어 당시의 집권자였던 최우는 재추 회의를 열어 강화로 도읍을 바꿀 것을 결정하고 1232년 6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오늘날 강화도로 옮기며 장기간 싸움의 각오를 굳게 다졌습니다. 이는 몽골에 대해 적의를 보인 것이어서 살리타는 7개월 만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 서경의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공략하고 오늘날 서울을 공격한 후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전진하였습니다. 그러나 해전에 약했던 몽골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지 못했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습니다. 하나 고려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고 몽골은 다시 남하하여 오늘날 용인을 공격하였습니다. 용인을 공격하다가 고려의 김윤후가 살리타를 화살로 적중하고 살리타는 죽게 되었습니다. 대장을 잃은 몽골군의 사기는 떨어지게 되었고 철수하게 됩니다. 이때 몽골군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우는 민희에게 가병 3천을 주어 반역자 홍복원을 처형하고 가족을 사로잡고 북부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습니다. 몽골은 1235년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당올태에게 따로 대군을 주어 고려를 재차 침략하였습니다. 몽골은 여러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았지만 4년간에 걸쳐서 한반도 전국 각지를 휩쓸고 다니었습니다. 이때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습니다. 몽골군은 이렇게 육지에는 손해를 끼쳤지만 강화도만은 침공하지 못하니 조정은 강화도에  지역을 차지하고 강화도를 굳게 막아 지켰습니다. 그리고 부처의 힘을 빌려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팔만대장경의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는 백성들에게 피해가 끼칠까 김보정 등을 적진에 보내 화해를 제안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다음 해 봄에 철수하였습니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몽골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며 왕족 신안공을 왕의 아우라 칭하여 몽골에 대신 보내고 신안공의 사촌 형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몽골에선 오도타이 칸의 뒤를 이어 귀위크 칸이 즉위하였습니다. 그러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오라고 요구하며 아모간에게 군사를 주어 4차 고려-몽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몽골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이해 문제의 어려움이 생겨 한때 철수하였으나 몽케 칸이 뒤를 잇자 예케를 시켜 고려를 재침공하였습니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다시 굳게 지키니 몽골은 또다시 공략에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몽골은 오늘날 철원, 양주 , 춘천, 양양 등을 공격하고 충주성에 다다랐습니다. 이때 돌연 예케는 병을 핑계로 철수하게 되는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습니다. 예케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고종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에서 예케의 사신과 접견하였습니다.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일에 거센 공방전 끝에 몽골이 손해를 입어 드디어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부 지역에 남아있던 몽골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다가 고려 왕자를 몽골에 인질로 보내 항복 의사를 비치자 완전히 철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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