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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

by 리틀풋 2022. 9. 16.

조선시대부터는 근대에 해당합니다. 조선시대는 초기,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기도 한답니다. 조선 초기부터 보겠습니다. 1388년 고려의 장수로서 우군 도통사를 담당했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감행해 정권을 잡고 우왕, 창왕, 공양왕 등을 왕좌에 올렸다 폐위하는 등 정권과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또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초가 되는 과전법을 단행하게 되고 경제적인 실권까지 손에 잡아 쥐게 됩니다. 정몽주가 제거되자 1392년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좌를 이어 새 왕조를 건국하여 태조가 되게 됩니다.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으로써 여러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습니다.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승리하게 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당성이 모자라게 된 집권으로 쇠미해진 왕권을 다시 강화시키고 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리하기 위해 육조 직계제와 관제 개정 등 관료제도를 정리하였습니다. 특히 사병을 철폐시키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계급을 다시 양민으로 바꿔주는 등 국가재정을 안위시키려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태조가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게 불쾌했던 태종은 서자 및 서얼의 관직 임용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구성된 서얼 금고령과 적서차별 제도는 성종 무렵 세부 조항을 성종 자신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한 개의 규정으로 정착되어 영조 때까지 서얼의 관직 임용을 제한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서 많은 서얼들의 임의로운 활동의 규제 및 사회적 차별을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유신을 자처하며 새로운 조정에 협력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태종 중반 이후 서서히 고려 유신 세대는 사라지게 되고 그 자식들은 새 조정에 벼슬을 하여 관청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전기에 등극한 세종대왕은 학문, 과학, 문화, 군사 등 다방 면에서 커다란 업적을 이루어 내었고 정치는 안정되어갔습니다. 게다가 국방을 안정시킬 요지로 북장 지역인 4군 6진을 개간하여 국경선을 결정시켰으며, 화포 제작 그리고 조선 기술 발달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예방하였습니다. 그리고 궁궐 내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짓고 학문을 진작하였습니다. 게다가 훈민정음이라는 한글을 창제하고 금속활자와 측우기를 개량하였으며 제례악, 궁중 연례악, 정악을 정리하였습니다. 노비 종모법이라는 조선시대 최악의 악법도 세종이 만들었습니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호패법을 복권하였습니다. 그리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성종은 개국 이후 문물제도를 정리하였습니다. 또 세종 때부터 끝나지 않고 이어져 온 법전 편찬 사업이었던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하고 국가의 의례서인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습니다.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신진사대부의 후예들인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15세기 말 지방의 사림 세력들이 정계에서 힘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연산군의 반복되는 실정에 참다못한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계기로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들은 명종 무렵 훈구파를 쫓아내고 조정의 실세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고 붕당정치가 탄생하였습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후손이자 정몽주의 후손이었던 사림은 세조 무렵 김종직 등이 중앙 정계에 나온 이래 꾸준히 힘을 키워 갔습니다. 김종직은 비록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찬위를 비난하였지만 이후 성종 무렵 훈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대상으로 사림파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면서 서서히 권위를 키워나갔습니다. 이와 동시에 사림은 향촌에서 향약과 소학 등을 전파함으로써 지역적 기틀을 다져놓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화를 입고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선조 무렵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마지막에는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습니다. 하나 이번에는 사류들 끼리 다시 갈등이 팽배해지자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석권하기 위해서 대를 이으며 서로 싸우게 되니 이것을 당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후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보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질긴 당쟁의 기틀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20만 군사를 몰고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이것을 임진왜란이라고 합니다. 미처 전쟁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조선의 군사는 일본의 대규모 조총 부대에 크게 힘들고 어려워하여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아니하고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한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본군은 곤경에 처하고 전국 각지에서 자율적으로 결성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일본군을 7년 만에 조선 땅에서 쫓아내게 되었습니다. 선조의 뒤를 이어 등극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번의 걸쳐 전쟁을 치른 뒤 황폐해진 한반도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척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실리를 중요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내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광해군과 광해군을 도와주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척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다시 찾기 위해 연합하여 1623년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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