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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 두번째 이야기

by 리틀풋 2022. 9. 17.

붕당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정치는 형성되었습니다. 마침내 서인의 권력은 17세기 중반의 예송논쟁에서 남인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남인도 탁남과 청남으로 나누어져 갈등이 커지게 되는데 1680년 경신환국으로 다시 권력을 잡게 된 서인으로 인해 균형이 깨지고 남인은 서인에게 철저히 억압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이 되고 이 둘은 강렬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몰아내기로 하는 일당 전제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로 인한 환국이 자주 생기게 되는 일이 반복됨으로써 영조와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탕평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19세기의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 씨 등 왕의 외척 세력의 세도정치가 60여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권력을 부리게 됩니다. 또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 강요를 물리치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여흥 민 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게 됩니다. 뒤이어 일본, 미국 등에 문호를 개국하게 됩니다. 1880년대에는 임오군란이라는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임금에 불만을 품고 군제 개혁에 반대하며 난리를 일으켰습니다. 개화 정권을 수립하려 한 김옥균과 그의 동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도 일어나게 됩니다. 1890년대 무렵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농민 수탈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마찰하게 되고 친일적인 갑오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친일 세력은 친 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일본군이 의병을 학살하는 사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봄으로써 흥선대원군은 물러나게 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민 씨 정권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드러나게 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평화적인 교섭은 포기한 일본은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의 군함 운요호를 끌고 한반도로 오게 됩니다. 일본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며 강화도 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은 이런 무력을 바탕으로 조선에 강제 개항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개항에 찬성하는 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이로써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내세우던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고 맙니다. 이 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일본 세력은 조금씩 국내에 침투하여 협박과 간계를 계속하다가 1910년엔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까지 합니다.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가져온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잇따라서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파견합니다. 조정에서는 개화 정책을 전담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기구를 두게 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합니다. 1880년 10월에는 미국과 수교하게 되고 연달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여러 강한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유생층은 개화 정책에 대해 보수적이었고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사회체제를 전통적인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생들 중 일부는 혁신적 인사로서 유교 문화를 계승하며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임오군란은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창설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 봉급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분노 및 분만으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입니다. 초기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 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기도 하였습니다. 1884년 10월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윤치호, 김옥균이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쫓아내고 개화 정권을 수립하려고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바로 개화파는 군사들을 동원해 낙성식에 참가한 대신들은 물론 불참한 수구파까지 처형하고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무너지게 되었고 지나치게 일본에 의존도가 높았다는 점에서 비판 받고 있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완전히 독립시키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런 상황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간섭을 시도하게 됩니다. 고종 또한 일본의 영향력 증가를 막기 위해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웠던 이범진과 김윤식으로 친러 내각을 새로 조직하고 반일 정책을 구체화하였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결국 요동반도를 잃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기 위해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 낭인 등을 결집해 경복궁에 몰래 침입하게 하고 친러 세력이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됩니다. 1895년 일본의 강박으로 김홍집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 내각이 조직되게 됩니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였던 단발령은 전국 유생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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