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

일본의 문화 통치와 말살 통치 (일제강점기2)

by 리틀풋 2022. 9. 19.

조선총독부 농림국은 산림령과 임야 조사령, 어업령, 광업령 등을 발표하였으며 자원 개발이나 회사 설립 인허가 등을 일본 자국민에게 유리하게 돌림으로써 사실 자본을 유출하고 경제적 지배권은 대부분 일본인에게 넘어가 한국을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으로 변환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담배와 인삼,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식민지 재정 수입을 증진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신작로와 간선 철도, 항만 시설을 정비하여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일본으로의 수송 편의를 돕고 일본 상품의 한국 판매를 효율화하였습니다. 한편 1920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숫자는 17만에서 40년에는 7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일부 한국인 지주도 생산성 상승으로 대단히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 그룹의 창립자 이병철이었습니다. 그는 경남 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나 일제에 쌀의 유통으로 얻은 아주 많은 액수의 돈을 밑천으로 1938년 대구에서 삼성 상사를 설립하였는데 그게 오늘날의 삼성의 시초였습니다. 문화 통치기를 살펴보겠습니다.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선 이미 존재하던 통치 방식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사이코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준점으로 원래 하고 있던 강압적 통치 방식에서 회유적인 통치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락되게 되었고 기초적인 초등 교육과 농업 교육이 증대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억압하는 등 민간의 고등교육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 대우하는 각종 악법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또한 헌병 경찰제도를 보통 경찰제도로 변경하였지만 경찰 수와 장비는 더욱더 증강하였으며 고등 경찰제와 치안 유지법을 도입하여 독립운동을 제지하였습니다. 또 신문에 대한 검열, 삭제, 폐간 등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등 민족주의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이에 반감을 가진 민족주의 세력 안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세분화화여 민족성 개조론이 대두되었으며, 이는 자치 운동으로 발달해 나갔습니다. 산미 증식 정책과 공출을 살펴보겠습니다. 한편으로 이 당시에는 일본 제국은 급격하게 공업화를 이루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일본 제국은 식량 부족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산미 증식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토지를 개량하거나 수리 조합의 역할을 증가시켜 한반도의 미곡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증산되는 양보다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 많아져 한반도의 식량 부족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증산 비용을 소작 농민에 떠밀어 총독부가 식민지 지주를 옹호하는 등 식민지 지주제가 심화되어갔습니다. 이 계획은 1930년대 초 일본 내부의 쌀 공급 과잉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1930대 후반 대륙 침략에 속도가 붙으면서 다시 계속되었습니다. 또 1차 세계 대전을 통한 일본 공업 자본의 성장으로 잉여 자본을 통한 식민지 공업화의 필요성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때 제사, 면방직, 등의 경공업 중소 자본의 투자가 늘어났고, 일본 대자본 일부의 투자도 있었습니다. 한편 한국인 자본의 회사와 공장 등의 성장도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한국인 노동자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차별은 노동쟁의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1년 일본은 중국 침략을 위해 만주를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데 이를 만주 사변이라 부릅니다. 일본은 대륙으로의 침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고 이에 따라 일본의 경제적 지배 정책 또한 병참 기지화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 무렵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 등을 선언하여 사상 통제를 증강하였고 일선 동조론을 통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도 이루어졌습니다. 대공황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보호 무역 강화로 인해 일본은 면방직 원료의 부족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에 남면북양 정책을 수립하여 공업원료를 보강하기 위해 남부에는 면화 재배와 북부의 면양 사육을 감독하며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발전소를 건설하였고 광업 분야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북부 지대에 군수공장들이 많이 지어졌습니다.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침공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국가 총동원령 하에 산미 증식 계획이 다시 시작되었고 미곡 공출제가 실시되어 한국인들은 식량을 배급받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전쟁 초기에는 지원병제와 징용제를 병행하여 실시하였는데 40년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이러한 폐해는 더더욱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만주 사변과 중일전쟁에 동원할 군인과 군자금, 군수품을 한국으로부터 조달하였으며 징용과 징발, 지식인들을 통한 자발적 징용, 징발 독려, 성금 모금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과 자본을 차출하였습니다. 160만의 한국인이 1941년까지 일본 내의 공장, 건설 현장, 탄광, 농장으로 일을 하러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은 전쟁에 끌고 갈 수 없다는 국제 규율이 있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남성 한국인은 전쟁이나 노동에 동원하게 하고 10대 초반부터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거나 군수 공장으로 보내졌으며 그중 대부분은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남양 지방의 최전선에 투입하게 시켜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포함하였는데 이 밖에도 필리핀과 태국,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일본 제국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 또한 일본군에게 끌려갔습니다. 생존한 사람들은 하루에 3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증언하였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가운데 유일한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역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반도에서 벌어진 비극 6.25전쟁  (1) 2022.09.19
한반도의 독립운동  (0) 2022.09.19
일본의 일제강점기  (0) 2022.09.18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 두번째 이야기  (0) 2022.09.17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  (0) 2022.09.16

댓글